'적대국' 한국에서 '백년의 적' 일본 물리치고 우승컵 들어올린 북한 여자 축구

- 기자, 한상미
- 기자, BBC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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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전문기자의 아시아축구연명(AFC) 여자 챔피언스리그(AWCL) 결승 현장 취재기
거센 빗줄기에 우비를 입고도 우산까지 썼던 20일 준결승전과는 사뭇 다른 날씨였다. 내리쬐는 뙤약볕에 숨이 턱턱 막혔고 그라운드에서는 열기를 식히려는 듯 연신 물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분명 23일 수원 최고 기온 23도랬는데, 체감은 마치 33도 같았다.
오후 1시 50분, 경기 시작 10분 전이 되자 양측 응원단의 목소리는 커져만 갔다. '경기가 곧 시작된다'는 장내 안내 방송도 흘러나왔다.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너무 더워서인지, 아니면 과연 누가 우승할까 하는 초조함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양팀 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흰색 유니폼의 '내고향여자축구단'과 녹색 유니폼의 '도쿄 베르디 벨레자'. 양측 간의 날선 긴장감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준결승 내내 북측만 응원해 그 이름마저 무색했던 공동응원단은 이날도 '내고향'을 목놓아 외치고 있었다. 준결승 당시 '수원FC 위민'의 실축에 환호하던 자국 국민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는 박길영 감독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북한에서 온 선수들과 한국 응원단 그리고 상대편 일본. 그렇게 또다른 의미의 '한일전' (한반도 vs 일본)이 시작되고 있었다.
수원에서 '인공기'를 휘날리다
북한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내고향' 선수들은 뛸듯이 기뻐했다. 부둥켜 안고 신나하는데 마치 오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준결승전 당시 현장에서 만난 탈북민 이철은 씨는 "만약 '내고향' 선수들이 우승하면 (김정은) 장군님을 알현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이번 대회가 전쟁"이라고 말했다.
북한연구소장을 지낸 정영태 동양대 석좌교수는 BBC에 "북한 여자 축구 우승이 주민들에게 상당한 정치적 메시지로 활용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정은 정권 자체를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설명인데, 앞서 핵 개발을 통해 주민들의 자존감을 높여준 것과 비슷한 논리라는 것.
정 교수는 "동시에 북한 체제는 이런 스포츠 활동을 통해 '역시 김정은 지도자는 위대하다'는 메시지를 대내외적으로 발신한다"며 "이번 우승은 북한의 '두 국가' 선포 이후 최대의 쾌거"라고 평가했다.
실제 북한 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은 24일자 보도에서 "내고향팀 녀자축구선수들이 거둔 자랑찬 경기성과는 당 제9차대회 결정을 높이 받들고 위대한 우리 국가의 전면적륭성기를 줄기차게 열어나가는 온 나라 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과 커다란 고무적힘을 안겨주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경기가 열린 사실과 남쪽 민간단체들의 응원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내고향' 선수들과 감독은 다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적대국' 한국 땅에서 '백년의 적' 일본에 패했을 경우의 수를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경기 내내 북측 선수들은 정말 쉬지 않고 열심히 뛰었다. 압박과 역습 효율에서 '내고향'이 훨씬 우세한 듯 했고 상대는 유효슈팅을 거의 만들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예선에서 일본이 3 대 0으로 이기고 올라왔다는데, 결승전에서는 분명 달랐다. 글자 그대로 '죽기 살기로' 뛰는 북한 선수들을 당해낼 재간이 일본 선수들에게는 없어 보였다.
전반에 선취골을 넣은 북측 선수들은 후반 마지막까지도 달리고 또 달렸다. 그만큼 간절했다는 소리다. 북한에서 최고지도자 접견자가 되면 대우가 달라진다고 했다. 우승이 코앞, 장군님을 만나뵐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후반으로 갈수록 내심 일본도 한 골 넣고 동점에서 승부차기로 이어지는, 더 극적인 경기를 바랐는데, 살짝은 허무하게도 북한 '내고향여자축구단'의 승리로 마무리 됐다.
우승 후 북측 선수들은 빨간 인공기를 부여잡고 신명나게 경기장을 한바퀴 돌았다. 공동응원단은 환호했고 일본 응원단은 침묵했는데, 가까이 다가오는 북측 선수들을 영상에 담으면서도 궁금했다. 김정은 위원장도 분명 이 경기를 보고 있을 텐데, 무슨 생각을 할까.
북한 여자 축구가 일본을 꺾고 우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국으로 망명한 류현우 전 쿠웨이트 주재 북한 대사대리의 책 '김정은의 숨겨진 비밀금고'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나온다.

김계관은 김정은이 요르단에서 열리는 17세 이하 여자 월드컵대회에서 우리가 베네수엘라를 3대 0으로 이기고 결승전에 진출한 것에 대만족을 표시했다고 운을 뗐다. 김계과이 전한 김정은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결승 경기 상대가 일본이므로 잡도리를 잘해야 한다. 선수들 영양 공급도 잘 해주고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사람들을 동원해 응원 조직도 잘 해주라. 우리 사람들이 요르단의 경기장에 나타나 열띠게 응원하면 선수들이 더 힘내서 뛸 것이다. 남조선도 일본과는 죽기 내기로 뛰는데 우리가 일본에 지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나. 외무성에서 책임지고 이번 결승 경기 응원 조직을 잘하라. 최룡해 당 부원장에게 당적으로 이 사업을 밀어주도록 지시를 하겠다." - '김정은의 숨겨진 비밀 금고' 중에서


흥행 성공한 AFC 여자 챔스
시상식에는 금빛 가루가 뿌려졌다. 대낮인데도 장관이었다. 하늘에서 금빛 비가 내려오는 듯 했다. 북한 선수들은 은빛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기쁨을 만끽했다. 꺄르르 웃음소리가 반대편 관중석까지 들렸다. '천리마 정신'으로 무장한 듯 억세게만 보이던 그들의 얼굴이 아이처럼 해맑아지던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여자 챔피언스 리그는 AFC 의도대로 흥행에 성공한 모양새다. 그들도 알고 있었을 터. 그러려면 북한팀이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는 사실을. 실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 지난 20일에도 국내외 언론이 대거 모여 현장을 취재했다. 그리고 준결승 경기 소식은 전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여자 축구에 이렇게 많은 관심이 쏟아진 적이 없다고 했다. 결승전이 펼쳐진 23일에는 2670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위해 AFC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지난 4월 살만 빈 이브라힘 알칼리파 총재가 직접 캐나다에서 김일국 북한축구협회장을 만나 북한 여자 축구를 '아시아의 등불'이라고 치켜세웠다. 북측의 '한국행'을 독려한 것인데, AFC는 이같은 내용을 홈페이지에 직접 공개하기도 했다.

한국에 일주일 간 머문 북한 선수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측 '내고향' 선수들이 한국에서 은빛 우승컵과 미화 100만 달러의 상금만 가져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에 온 그들은 먼저 인천국제공항을 보았고 인천과 수원을 오가며 길게 뻗은 포장 도로를 달렸다. 높게 솟은 마천루와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자유롭게 오가는 시민들까지 그렇게 일주일간 머물며 한국을 경험했다. 다채롭고 풍부한 한식 또한 매일 맛봤을 것이다. 오후 2시 환한 대낮에도 사방에 켜져있는 경기장 불빛들과 누구를 응원하더라도 상관없는 '자유'도 체험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김정은 위원장이 가장 두려워하는 '체제 위협 요소'가 아닐까. 북한이 외부 정보를 차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내고향' 선수들 대부분 20대로 소위 '장마당 세대'일 터. 1990년대 극심한 경제난인 '고난의 행군' 이후 태어나 무상 배급 및 무상 의료 등 당국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자란 '북한판 MZ 세대'라는 말이다. 물론 축구 선수로서 특별 관리야 받았겠지만 보통 그 또래가 그러하듯 한국 드라마나 영화, 음악 등을 단 한번이라도 경험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북한에 돌아가면 '자본주의 색채'를 빼내기 위한 총화를 받겠지만, 그들 마음속 어딘가에는 분명 남게 될 것이다. K-드라마와 영화에서 보던 것과 똑같은 한국의 진짜 모습 말이다.

















